기획재정부는 지난 21일 주식 양도소득세를 부과하는 대주주의 종목당 보유액 기준을 현행 10억원에서 50억원으로 상향하는 내용의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예고했다. 개정안은 오늘 26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뒤 곧장 공포·시행된다. 23~25일이 성탄절 연휴임을 감안하면 단 3일 만에 모든 절차가 마무리되는 ‘초스피드 행정입법’인 셈이다.
대통령령인 시행령 개정은 입법예고-법제처 심사-차관회의-국무회의-공포 등의 절차를 거친다. 통상 입법예고에만 최소 40일 이상 기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이번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안은 입법예고 기간을 단 이틀로 크게 단축했다. 20일 이상 걸리는 법제처 심사는 단 하루 만에 마쳤다. 차관회의 상정·논의는 생략됐다.
이처럼 절차를 단축·생략하면서까지 개정을 서두른 것은 연내 시행해야 할 ‘급박한 필요성’이 있다고 인정됐기 때문이다. 대주주 양도세 부과대상자는 매년 사업연도 종료일(증시 폐장일) 현재 주주명부 등록 내역을 기준으로 확정된다.
올해는 29일이 폐장일이다. 주주 명부 등록은 마지막 거래일인 28일 이틀 전 거래 내역을 기준으로 이뤄진다. 따라서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안이 26일부터 시행될 경우 26일까지 종목당 보유액을 50억원 미만으로 낮춘 투자자는 양도세를 내지 않아도 된다.
정부가 양도세 완화를 추진한다는 보도는 이미 11월 초부터 나왔다. 하지만 실제 시행령 개정은 연말을 코앞에 둔 이달 19일 이후에서야 급물살을 탔다. 이 같은 결과가 나오기까지 대통령실과 기획재정부 등 관계부처에서는 양도세 완화 추진을 놓고 치열한 ‘물밑 논의’가 오갔다.
'개미' 요구로 시작된 양도세 완화
대주주 양도세는 주식을 종목당 10억원 이상 보유하거나 특정 종목 지분율이 일정 수준(유가증권시장 1%, 코스닥시장 2%, 코넥스시장 4%) 이상인 투자자를 대주주로 간주해 양도차익에 20%(과세표준 3억원 초과는 25%)의 세금을 매기는 제도다.
제도가 처음 도입된 2000년에는 종목당 보유액이 100억원이었다. 이후 2013년 50억원, 2016년 25억원으로 낮아졌고,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초부자 증세’를 명분으로 2020년 10억원까지 다시 낮췄다.
그동안 금융투자업계에서는 시장 안정과 투자심리 제고를 위해 대주주 요건을 상향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주식시장에서는 연말마다 대주주 지정을 피하려는 개인들이 보유 주식을 대거 팔아치우는 ‘매물폭탄’ 현상이 되풀이됐다. 양도세 부과 대상자를 확정하는 시점이 매년 증시 폐장 직전일이기 때문이다.
양도세 기준일인 작년 12월 27일에도 개인은 유가증권시장과 코스닥시장에서 총 1조5372억원어치를 팔아치웠다. 직전일인 12월 26일에도 9655억원어치를 순매도했다. 지난해 정부가 대주주 요건을 종목당 10억원에서 100억원으로 상향하는 방안을 추진했다가 야당의 반대로 10억원으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데 따른 것이다.
개인투자자들은 대주주 등 ‘큰 손’의 증시 이탈을 막기 위해선 양도세 완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정의정 한국주식투자자연합회(한투연) 대표는 “주식시장을 움직이는 건 큰 손인데 높은 세금을 내면서 국내에 머물 큰 손은 없을 것”이라며 “결국 국내주식에서 이탈해 미국주식으로 가거나, 부동산 시장으로 자금이 흘러들어갈 것”이라고 지적했다.
용산, 공매도 이어 양도세 '드라이브'
정부 내에서 대주주 양도세 완화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건 지난 10월 중순이다. 같은 달 15일 금융감독원은 BNP파리바와 HSBC 등 글로벌 투자은행(IB) 두 곳의 불법 무차입 공매도 행위를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금감원은 “글로벌 IB가 실수나 착오가 아니라 고의성을 가지고 불법 공매도를 한 사례를 적발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설명했다.
그동안 ‘심증’에 머물러 있던 고의적인 불법 공매도가 ‘물증’으로 드러나자 개인투자자들은 격앙됐다. 국회에서도 공매도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쳤다.
그러자 대통령실이 움직였다. 당시 대통령실은 국정기획수석실(현 정책실)의 ‘MZ세대 어공(어쩌다 공무원)’들을 중심으로 ‘공매도 금지’와 ‘양도세 완화’라는 두 개의 카드를 검토했다. ‘주식 양도세 폐지’는 지난 대선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내건 공약이기도 했다.
대통령실은 우선 공매도 금지에 미온적이었던 금융위원회 등 관계 부처를 움직여 공매도 금지를 관철시켰다. 11월 5일 금융위는 내년 6월까지 공매도를 전면 금지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대통령실은 연내 시행을 목표로 양도세 완화에 착수했다. 한 관계자는 “자본시장을 들여다보니 단순히 공매도뿐 아니고 세제에서도 불합리한 지점이 적지 않았다”며 “대주주 양도세는 결국 큰 손들이 주식시장을 기피하게 만드는 원인으로 작용하고, 이는 전체 ‘개미’들의 피해로 이어진다는 점에 착안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기재부와 용산 내 ‘기재부 늘공(늘 공무원)라인’은 양도세 완화에 소극적이었다. 사상 유례없는 공매도 전면 금지 조치가 단행된 만큼 일단 시장의 반응부터 살피자는 게 주된 반대 논거였다. 기재부는 연말로 다가온 예산안 처리를 앞두고 세제 분야에서 여야 간 새로운 쟁점을 만드는 것도 부담스러워했다.
앞서 더불어민주당은 지난해 정부가 대주주 양도세 요건을 100억원으로 높이는 방안을 추진하자 ‘부자감세’라고 공격했다. 여야는 작년 말 예산안 협상에서 금융투자소득세 시행을 2025년부터로 2년 유예하는 대신 대주주 양도세는 현행 기준을 유지하기로 합의했다.
정책을 입안한 어공들은 ‘당위론’을 내세워 설득에 나섰다. 공매도 논란으로 이미 ‘자본시장 개혁’ 논의에 물꼬가 트인 만큼, 올해를 넘기지 말고 연말 비정상적인 양도세 회피 매도 물량 출현 이전에 시행령 개정을 완료하자는 주장이었다. 반면 기재부 라인에서는 정부가 제출한 예산안의 원활한 국회 통과가 우선돼야 한다는 ‘현실론’을 펼쳤다.
11월 둘째 주에 접어들며 대통령실에서는 양도세를 종목당 보유액 50억원까지 완화하는 쪽으로 사실상 결론이 났다. 그러자 이번엔 기재부 측이 예산안 법정 처리시한인 12월 2일까지 공식화를 늦추자는 의견을 냈다.
이후 약 한 달간 대주주 양도세 완화 논의는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추경호 부총리 겸 기재부 장관은 11월 12일 KBS에 출연해 “기준 완화에 대해 방침이 결정된 것은 전혀 없다”고 했다.
尹 귀국 후 태도 바꾼 기재부
예산안 협상이 여야 논의 지연으로 12월 둘째주까지 밀리자 용산이 다시 움직였다. 11월 말 정책실 신설 및 이관섭 국정기획수석의 정책실장 승진으로 주도권을 잡은 정책실에서 “예산안 논의와 관계없이 시행령 개정 절차를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그런 와중에 추 부총리는 지난 12일 기자간담회에서 “양도세 기준 완화를 현재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지 않다”며 추진 의사가 없음을 거듭 천명했다. 시장은 연내 양도세 완화가 불가능해졌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추 부총리 발언 후 에코프로비엠 등 개인 투자 비중이 높았던 2차전지 관련주가 양도세 회피용 매출 출현 우려에 일제히 하락했다.
결국 윤석열 대통령이 네덜란드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지난 15일께서야 ‘교통정리’가 이뤄졌다. 윤 대통령은 이전부터 공매도 금지와 양도세 완화 등 사안에 대해 “숫자만 보지 말고 현실을 봐라”며 투자자 입장에서 정책을 펼 것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최상목 신임 부총리 후보자는 19일 국회 인사청문회에서 “자산·국가 간 자본 이동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며 기재부 차원에서 양도세 완화에 처음 긍정적인 의견을 냈다. 기재부는 이틀 뒤인 21일 소득세법 시행령 개정안을 공식 발표했다.
관가에서는 양도세 완화가 이관섭 정책실장 취임 후 사실상 ‘첫 작품’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이 실장은 관료(늘공) 출신이지만 정무 감각이 뛰어나고, MZ세대 어공들이 제안하는 정책에도 귀를 기울이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한 관계자는 “양도세 완화는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인 이 실장이 비로소 ‘모피아(기재부 출신)’의 전유물로 여겨진 세제 등 영역에 개입을 본격화한 첫 사례로 보면 될 것”이라며 “앞으로 물가 등 산적한 현안에서 얼마나 그립을 쥐고 리더십을 발휘할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평가했다.